전화 속 넘어로 들리는 대 참사

벌써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꽤 중요한 계약 건이 있어 사수인 부장님과 함께 미팅에 참석했습니다.

거래처는 우리 제품을 아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듯했고, 기분 좋게 악수를 나누며 일어설 때쯤엔 이미 계약이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회사로 돌아와 최종 계약서를 클라이언트에게 보냈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거래처 결정권자인 상무님이 부장님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부장님은 능숙하게 남은 협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제 정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30분 뒤, 거래처 실무 담당자가 제게 다급히 전화를 걸어와서는 돌연 계약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하는 것입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점심에 먹은 밥이 꽉 체하는 듯했습니다.
아니 왜? 방금 전까지 분위기 최고였는데? 그리고 부장님 놔두고 왜 하필 나한테 전화를?

저는 사정하듯 담당자에게 이유를 캐물었습니다.
담당자는 몹시 난처해하며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는데…
듣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부장님은 거래처 상무님과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기분 좋게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한 순간 혼잣말로 이렇게 내뱉으셨죠.
“하… 이 새끼 진짜 깐깐하게 구네…”

문제는 그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부장님의 그 적나라한 뒷담화는 수화기 너머 상무님 귀에 고스란히 생중계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부장님은 폴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막 갈아타신 참이었습니다.
다이어리형 스마트폰 케이스 덮개를 닫으면 당연히 통화가 종료되는 줄 아셨던 겁니다.

결국 저는 다른 임원분을 모시고 다시 거래처로 찾아가 백배사죄를 한 끝에 겨우겨우 계약을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 아찔한 사건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단순히 전화기를 제대로 끄지 않은 기계 조작 실수가 아닙니다.
평소 전화를 끊자마자 습관적으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던 부장님의 잘못된 입버릇이 불러온 참사였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저에게는 철칙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무리 거래처나 고객이 없는 편한 자리라도 반드시 님 자를 붙여 호칭하고,
휴대폰에 연락처를 저장할 때도 무조건 이름 뒤에 님 자를 붙이는 버릇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태도가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밖으로 새어 나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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