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천재를 만났을때

저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미대 입시를 위해 1년 남짓 학원을 다녔는데, 주변에서는 제게 꽤 재능이 있다고들 했습니다.
실제로 습득력이 빨랐고, 금세 학원에서 인정받는 에이스가 되었습니다.

부산대학교 미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곧바로 미술학원의 인기 강사로 출강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잘 해내며 돈까지 벌 수 있었으니, 제 인생에 더 이상의 걱정은 없는 듯했습니다.

그 학생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부득이하게 학원을 옮겨 새로운 곳에서 데생 강사로 일하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늘 그랬듯 학생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시범을 보이고 있는데, 한 학생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제 그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 녀석은 뭐지?’

저는 시범을 멈추고 학생들에게 직접 데생을 지시했습니다. 그러고는 단단히 벼르며 그 불만 가득했던 학생의 이젤 뒤로 다가갔습니다. 어디 한번 매섭게 지적해 주리라 마음먹고서요.

그런데, 그 학생의 데생은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이제 막 형태를 잡는 스케치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제가 지적할 틈이 없었습니다. 제 눈에는 단 하나의 틀린 부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강사 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가르쳤던 선생님의 그림에서도, 촉망받던 선배 강사의 그림에서도 미세한 흠을 찾아내던 저였는데, 유독 그 학생의 스케치 앞에서는 아무런 오점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 엄청난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그 학생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아니 그 학생 곁에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어 결국 며칠 뒤 조용히 강사 생활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요즘도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피식 헛웃음이 납니다.
최근 만화가 이현세 선생님의 ‘천재를 만났을 때의 대처법’이라는 글을 보며 그 시절의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비록 그 글이 제 마음을 완전히 속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좌절하는 대신 그냥 그 학생의 압도적인 그림을 있는 그대로 즐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섞인 상상을 해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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